[칼럼] 균형에 대한 단상

헤르메스학에 근거해 수행을 하는 구도자의 기본 목표는 ‘균형’이다.

동양권에서 형이상학 또는 철학의 궁극 목표이자 군자를 가늠하는 기준이었던 ‘중용’과 일맥상통한다.

<소환마법실천>에서 바르돈은 마법사가 성취해야 할 균형 또는 중용의 수준이 악 또는 악마의 존재에 대해, 그 필요를 알 뿐 아니라 활용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인간이 악을 행해야 한다는 뜻이 절대 아니다. 우주보편법칙, 카르마법칙의 참뜻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엉뚱한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신의 형상을 입은 존재, 인간은 4원소와 아카샤원리로 구성된, 피조물 중의 유일한 존재다. 4원소가 균형을 이룬 상태. 그것은 우리의 성격과 행위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감정의 표출에서도 드러난다. 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지배할 수 있는 것이 균형, 즉 중용의 상태다. 우리 인생의 시나리오 즉 운명이 우리를 지배하는 통로는 감정이다. 따라서 균형상태를 이룬 인간은 운명을 지배한다.

유튜브 쇼츠를 한칸씩 위로 올리면서 생각한다. 어딘가에서는 심각한 드라마가 진행되고, 어딘가에서는 얼토당토 않은 개그가, 어딘가에서는 개그보다 더 개그같은 뉴스가 흘러간다. 공 하나에 목숨건 듯 달리는 축구선수들, 드라마보다 더 심각한 만화 주인공, 홀린 듯 노래하는 가수, 알몸으로 땀흘리는 에로 배우, 낚시, 주식, 종교인들…. 거기 열중하고 있을 때, 오직 그것만이 세계 전체다. 어쩌면 ‘전지’라는 신의 덕목은 리모콘으로 채널을 돌리는 것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렇게 ‘거리두기’와 ‘균형’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주어진 환경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한다. 그 순간만은 그것이 ‘모든 것’인 양. 그러나 균형을 성취한 자는, 이 치열함과 동시에 ‘자기반성’을 끼고 살아야 한다. 관찰자이며 동시에 실행자여야 한다. 끊임없이 도는 팽이처럼, ‘활동’을 해야 균형을 찾아갈 수 있다. 가만히 주저앉아서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으므로.

자기반성이란 정말 막강한 무기다. 중심에는 엄중함을,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관용과 사랑의 강도를 높여준다. 지금까지의 결론은 이것이다. ‘균형’을 성취하는 첫 번째 통로는 ‘자기반성’이다!

개인이 그러하듯, 이것은 조직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중심에 다가설수록 엄정하고 순수해야 한다. 그러나 그 바깥은 관용적으로 열린 상태여야 한다. 그것이 그 조직의 풍성함과 다양함을 유지시키며 동시에 순수성을 지켜가게 해준다. 조직의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따뜻함으로 주변을 돌보면서 동시에 자신이 어디를 딛고 서있는지 자기반성을 일삼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