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운이 나쁜 시기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마법사라면! 입문자라면!
운명을 탓하지 말라,
운 나쁜 것을 내세워 핑계로 삼지 말라

점성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이후로 ‘운의 흐름’ 즉 행성의 운행에 따라 드러나는 사건과 환경에 대해 민감하게 되었다. 어찌 그리 벗어남 없이 나를 에워싼 모든 것이 척척 배열되며 짜맞춰지는지… 그래서 점성학 공부를 조금이라도 한 사람들이 모이면 나는 토성이 어째서 금성이 어째서 아니 태양이 어디 있어서 이러저러하다는 이야기가 대화 주제가 되곤 한다. 특히 운의 흐름이 좋은 시기나 나쁜 시기는 중요한 이슈가 되곤 한다. 물론 이러한 대화는 점성학도에게 더할 나위 없는 공부가 된다.

그러나 운명이, 운의 흐름이, 자기 행위와 선택의 방패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이것은 점성가의 함정이 되곤 한다. 성찰과 반성이, 전투와 변성이, 운명보다 우위에 있어야, 그것이 마법사다. 우주적 신 까르마가 던져놓은 장애와 싸워 변성하고 발전하기 위하여 마법을 공부하는 것 아닌가! 운명의 무게를 넘어 나의 타고난 그릇을 더 크게 만들기 위해 수행하며 입문하는 것 아닌가!

운이 좋다?
점성학을 비롯해 추명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오해하곤 하는 문제가 있다. 격(格)과 운(運)을 혼동하는 것이다. 그릇이 작으나 운이 좋은 사람이 있고, 그릇이 크나 운이 나쁜 사람이 있다. “운이 좋다 나쁘다”는 말은 장애의 많고 적음을 의미한다. 하는 일마다 만나는 환경마다 발목을 잡고 덫을 놓는다면 그것을 가리켜 “운이 나쁘다”고 한다. 하는 일마다 등 뒤에서 바람이 밀어주며 앞길이 트인다면 그것을 “운이 좋다”고 말한다. 그러나 운이 좋다고 해서 큰 인물이거나 이름을 남길 만큼 대단한 일을 하며 살거나 인품이 좋거나 영적으로 레벨이 높은 것은 결코, 절대, 아니다.

그릇의 크기
그것은 그릇의 문제이다. 그릇의 크기란, 책임의 범위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곧잘 하곤 하는 이야기가 있다. “나는 메시아도 구세주도 아니다. 세상 온갖 문제들에 대해 책임질 일이 없다. 진지하게 마법을 공부하고 입문하고자 하는 이들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다.” 그렇다. 그것이 나의 그릇이다. 제 한몸에 대한 책임으로 전전긍긍하는 사람, 제 가족이 최고의 가치인 사람, 국가와 세계사에 결정과 책임을 지는 사람, 인류 전체의 영적 레벨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 그릇과 격은 이처럼 천차만별이다. 한평생 소소한 일을 하며 평범한 삶 속에서 그다지 평지풍파를 겪지 않고 살다 가는 사람이 있다. 그는 ‘운이 좋은 범부’이다. 그러나 그릇의 크기, 격의 높고 낮음을 따지자면 소소하게 작은 그릇이다. 물론 작은 그릇인데 운이 나쁜 경우도 있다. 많은 이들이 가장 공포스러워 하는 일일게다.

그런데 까르마는 딱 그릇의 크기 만큼만 장애, 즉 나쁜 운을 덫 놓는다. “감당치 못할 시험은 허락지 아니하신다”는 성서의 말씀이 그것이다. 그릇이 크다면 그가 겪을 시험과 장애는 범부가 겪을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물론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이 겪는 슬픔과 고통과 시련의 크기가 가장 크며 중요하겠지만 말이다.

운의 흐름
또한 한평생 구구절절 운이 나쁘기만 한 삶은 없다. 한평생 좋은 운만 펼쳐지는 삶도 없다. 각각 제 그릇의 크기에 맞춰, 행성이라고 부르는 서로 다른 힘이 때에 따라 주도권을 갖고 좋고 나쁨을 주도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것이다. “행성의 위치와 힘의 특성이라는 지표는 나의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다!” 나는 무색무취인데, 오직 환경이 장애가 되어 길을 가로막는 경우는 없다는 말이다. 나의 에너지가 바뀌며, 나의 충동이 바뀌며, 나의 생각하는 방식이 바뀌며 나의 행동 양태가 바뀌며, ‘같은 것은 같은 것을 끌어오는’ 법칙에 따라 나의 에너지와 유사한 것이 나를 에워싸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행동하므로 그런 결과가 일어나는 것이다. 운이 나빠질 때 나타나는 경향성이 있다.

운이 나빠질 때 나타나는 경향성
1. 제 그릇, 제 본분을 망각한다. 작은 그릇이 큰 그릇 흉내를 내거나 그것을 선망한다. 교만해진다.
2. 리트로그레이드하는 행성이 주도권을 가지는 경우, 무력감, 무능력, 게으름, 나태, 좌절감에 휩싸인다.
3. 무능해진다. 잘 하던 것도 잘 안된다. 반대로, 원래 못하던 것이 운이 좋아진다고 잘하게 되는 경우는 없다.
4. 환경 탓을 한다. 성찰보다는 원망을, 반성보다는 전가하기에 급급하다.
5. 조언이나 충고가 들리지 않는다. 감정 및 충동과 거리 두기가 불가능하다.
6. 그래서 최악의 선택을 한다.
7. 주변에 민폐를 끼친다. 까르마를 공유하고 있는 정도에 따라 민폐의 크기가 달라진다.

운이 좋아진다고 그릇이 커지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운이 나쁜 시기에 들어간다고 그릇이 작아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있다. 운이 나빠질 때 사람은 제 그릇의 바닥을 드러낸다. 장애와 시련의 크기는 그릇에 비례하여 커진다.

운이 나쁜 시기는 왜 있는가?
시시때때로 입에 침이 마르게 강조했던 것을 기억하라. 이번 생의 장애와 시련은, 사전 등록된 찬스 카드이다. 반복하여 질문하는 까르마의 주께 다른 답을 내놓게 만드는 찬스 카드! 내 꼴, 나의 경향성, 불균형과 충동에 따라, 어떤 질문 어떤 상황에 직면하면 늘 비슷한 답을 내놓는다. 비슷한 결정을 하고 비슷한 행동을 한다. 전생리딩에서 절감하지 않았는가. 그 생이 그 생인 듯 매번 똑같은 이유. 찬스 카드를 외면하고 뛰어넘지 못한 내 탓이다. 영적 레벨을 높일 기회! 이것을 위해 우리는 이번 물질계 생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마법에 접근하여 그 기회를 낚아챌 수 있는 호기를 만났다.

영적 레벨을 높인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릇의 크기를 키우는 것이다. 나 하나 추스리는 데 급급한 삶에서 우주에 기여할 만큼의 책임있는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릇의 크기를 키우는 것은 바로 장애와 시련의 한복판에서 이루어진다. 운이 좋아지면 대단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가? 바닥의 정점에서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그저 소소한 기쁨 속에서 평범한 일상을 향유하는 것이 삶의 목적인가? 그렇다면 바닥의 정점에서 네 그릇에 집착하며 그릇을 지키는 데 온힘을 쏟아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면서. 지나간 시간 뒤에, 너의 타고난 그릇만큼, 온갖 전생의 얼룩들이 엉겨붙은 그대로의 열매가 남을 것이니. 이번 생도 꽝이 될 것이다.

운이 나쁜 시기엔 어떻게 살아야 하나? (토성의 조언)
내적으로 : 잠잠히 아픔을 삼켜라. 네가 토성의 비탄을 아는가? 결코 알 수 없으리라. 그 주제에 슬프다고 고통스럽다고 나불대지 마라. 원망과 슬픔과 좌절이 몰려올 때마다 청소를 해라. 주변을 깨끗하게 정돈된 상태로 만들어라. 너 자신의 악덕을 성찰하고 반성하라. 날마다 결계하고 영과 혼의 더러움을 닦아라. 겸손하라. 너의 그릇을 인정하라. 악덕을 이겨낼 수 있도록 긴장하고 또 긴장하라.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가장 잘할 수 있도록 뛰고 또 뛰어라. 똑바로 앉아라. 잠들기 전까지 눕지 말아라. 똑바로 누워라. 잠은 조금만 자며 각성 상태를 유지해라. 멍하게 앉아 있는 시간이 너를 구덩이로 몰아 넣을 것이다. 가장 기초적인 수행을 반복해라. 말을 적게 하라. 네가 뱉는 것마다 독이다. 선택하고 결정할 일이 있거든 미뤄라. 그럴 수 없으면 조언을 들어라.

외적으로 : 탓하지 마라. 네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라. 너의 까르마, 너의 악운을 나눠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네가 뱉는 독을 마시고 있는 사람들이다. 있는 힘을 다해 감사를 표하라. 네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것으로 주변 사람들을 공양해라. 모든 것을 섬기고 받들어라. 신과 스승은 물론이고 동물이고 식물이고 네 가진 것을 나누고 받들어라. 스승의 가르침을 일획도 어김 없이 그대로 실행하라. 토 붙이지 마라. 머릿속에 반항심이 들끓거든, 그때마다 손목에 고무줄을 감고 튕겨라. 책임을 회피하지 마라. 그릇의 크기는 곧 책임의 크기임을 잊지 말라.

그리고 : 매순간 기도하고 기도하라. 신의 진동을 입는 것, 신의 사랑 안에서 너 자신을 정화하여 장애를 뛰어넘을 힘을 얻어라. 오직 그 진동만이 너의 독과 악덕을 정화할 수 있다.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 스승이라도 너의 악덕과 부정적 진동을 견뎌낼 재간이 없다. 끊임없이 은총을 간구해라. 시련을 거두어주십사 간구하지 말고, 이것을 통해 너를 성장시킬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해라.

이것이 너의 그릇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이다. 오직, 운명의 가장 바닥 한가운데에서만 이룰 수 있는 일이다. 특히 책임과 섬김, 받듬이 그릇의 크기를 확대하는 요체임을 잊지 마라.

마법사! 운의 흐름, 운명의 굴레를 뛰어넘는 자!
마법사로서 비의에 입문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신과 합일하기 위해서? 그것이 구체적으로 너의 삶에 무엇인가? 어떻게 신인이 되며 어떻게 신이 되며, 아니 어떻게 신의 진동으로 너 자신을 채울 것인가. 신처럼 완전해지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입문식의 순간을 기억하는가? 이름을 새로 받은 순간을 기억하는가? 그 이름은, 더 이상 운명에 무릎을 꿇지 않고, 신의 그릇만큼 큰 장애와 시련을 달게 받아 정련될 길고 긴 여정의 첫 걸음이다. 신의 아타노르에 뛰어드는 용자의 몸 던짐이다. 시련이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시작점이다. 비로소 장애를 통해 변화하는 자신을 지켜보고 기뻐할 기회를 만난 것이다.

말쿠트 위계에서 자신이 타고난 운의 바닥을 경험하는 자는 축복받은 자다. 이제 일곱 행성이 나눠 주는 미덕과 악덕, 기쁨과 고통, 플러스 진동과 마이너스 진동을 진하게 경험하게 될 터이니, 자신의 천궁도에 배치된 사건(시공간)들을 시작으로 힘의 핵에 다가서게 될 것이니. 말쿠트에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낸 자야말로 입문자의 단련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경험할 것이며, 거기서 살아남은 자는 그릇의 크기를 키워 더 큰 단련에 도전할 수 있다. 자기 운의 흐름과 상관 없이 일곱 신이 내미는 단련의 진동에 온몸을 맡기고 승리할 기회를 얻게 된다.

마법사가 되면 아무 시련도 없이 도깨비 방망이로 모든 장애를 쳐부수며 승승장구 운좋게 기쁜 일만 겪으며 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그것이 운명을 바꾸는 길이라고 생각들 한다. 그렇지 않음을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일곱 신의 은총은 플러스와 마이너스다. 그 둘을 겹겹이 모두 지배할 수 있어야 신과 합일할 수 있다. 운명의 굴레, 까르마의 무게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입문하여 위계를 올라가며 일곱 신의 은총을 받기 시작하면, 더 이상 운의 흐름은 의미가 없다. 그것이 입문이다.

그러니, 마법사여, 운명의 굴레에 스스로를 가두는 한 너는 마법사도 입문자도 아니다. 시련을 축복으로 여겨라. 온몸을 휘감는 무기력과 무능함과 좌절과 슬픔을, 온 힘을 다해 떨쳐 내고 신의 아타노르에서 정련되고 있음을 감사히 여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