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관(直觀)이란 무엇이며, 직관은 어떻게 훈련할 수 있을까요? 우선 직관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습니다.
① 감관(感官)의 작용으로 직접 외계의 사물에 관한 구체적인 지식을 얻음
② 감각, 경험, 연상, 판단, 추리 따위의 사유 작용을 거치지 아니하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작용
①번을 봤을 때, 감관(感官-Sense)이란 말이 벌써 우리 앞을 가로막습니다. ‘감관’은 ‘감각 기관 및 그에 따른 지각 작용을 포함하여 생리 작용과 심적 작용을 통일적으로 생각하는 경우에 관련하여 철학에서 사용하는 말-감각 기관과 그 지각 작용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사전적 정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직관’을 논하기 전에 철학의 근본적인 질문, ‘앎은 어디에서 오는가?-인식론’에 대해 먼저 다루는 것이 순서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에서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명제까지, 그리고 칸트부터 비트겐슈타인, 움베르토 에코 등 현대 철학자들도 ‘앎’에 대해 몇천년간 진지한 토론을 펼쳤습니다.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한국말로 ‘직관’이라는 번역어가 같더라도 철학자마다, 학문마다 뜻하는 바가 조금씩 다릅니다. 이 차이를 비교하며 분석하고 싶다면, 서양철학을 진지하게 공부해 보는 것도 좋겠죠.
②번 뜻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직관의 의미와 가깝습니다. 이런저런 설명이나 사전지식 없이, 보자마자 ‘아~!’하며 외치게 되는 ‘앎’이죠. 물론 경험과 기억을 배제한 ‘앎’이라는 것은 성립하기 참 어렵고 상상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직관적이다.’ ‘직관적인 디자인’ 이라고 넌지시 사용하고 있는 표현을 떠올려보세요. 스마트폰을 예로 들면, ‘손가락으로 화면을 넘기는 행위’는 매우 본능적이고 당연하며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습니다. 딱히 사용설명서를 읽지 않았지만 비슷한 ‘터치스크린’을 볼 때마다 어렵지 않게 기능을 유추할 수 있는 것이죠.
마법적인 직관은 위의 ①번 뜻에 가깝습니다. 직관은 멘탈계(객관적인 앎의 세계)에 멘탈질료로 떠다니는 생각덩어리들을 나의 멘탈체(영)-멘탈 매트릭스가 잡아내어 아스트랄체(혼)-아스트랄 간뇌-두뇌의식(육)으로 필터링되는 과정입니다. 멘탈 매트릭스에서 생각덩어리를 잡아냈을 때, 섬광같은 번뜩임 같은 느낌을 받은 경험 한번쯤은 있을것입니다.
나의 아스트랄 간뇌는 상징-이미지-그림언어의 형태로 생각덩어리를 해석합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거나 보았을 때 느끼는 ‘첫인상’이나, 무언가 일이나 분위기가 잘못되어갈 때 ‘쎄-한’느낌.(쎄-함은 과학입니다.) 학습된 경험이 총동원되어 떠오르는 잠재의식레벨의 본능 같은 것이죠.
만약 이 과정에서 해석을 못했다면, 우리 두뇌는 그 ‘생각덩어리’를 잠재의식으로 보냅니다. 깊은 나의 뇌 속 저편에 ‘대기’상태로 두는 것이죠. 여러 생각과 감정이 뒤섞인 심연으로 밀려나는 것입니다. 이 ‘대기’상태에 들어간 생각들은 잠시 일상생활에서의 생각 모드가 멈추었을 때(잠들어서 꿈을 꿀 때) 다시 수면 위로 드러납니다. 잊어버린 물건을 전전긍긍하며 생각할 땐 어디 있는지 감을 못잡다가 갑자기 일하던 중 특정 장소가 번뜩! 하며 기억나는 것과 비슷합니다.
시험 볼 때 꼭 생각이 많을수록 틀린 기억이 있을 거예요. ‘아 찍었는데, 괜히 고민하다가 고쳐서 틀렸어’ 같은 경험이죠. 멘탈차원에서 원하는 정보를 캐치했더라도, 감정의 도가니와 두뇌의식을 거치면서 그 정보는 점점 왜곡됩니다. 오랫동안 반복된 것일수록 여러가지 요소에 뒤덮여 원래 의미를 찾기 어려워지기까지 합니다. 마치 지하철을 타기 전의 나는 상태가 깨끗했으나, 지하철을 내릴 때의 나는 지쳐있는 것을 떠올리면 이해가 빠르겠지요?
그래서 타로를 뽑을 때 혹은 어떤 형태의 점술기법이라도 본인의 감정과 트라우마, 오만 생각덩어리들을 잠깐 떨어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답’이라 생각한 것들은 사실 약간의 콤플렉스(아, 난 이거 싫은데)만으로도 쉽게 오락가락하죠. [헤르메스학입문] 실천편 1단계에서 나오는 사고제어/단련/통제를 훈련하며 점점 나아질 수 있습니다. ‘직관’을 훈련한다라는 것은 자신의 머릿속 상태를 제로’0’-디폴트(Default), 컴퓨터로 치면 안전모드 상태로 만드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비행기가 착륙할 때 활주로를 잘 닦아놓는 것과 비슷한 이치입니다.
타로를 뽑았을 때, 눈앞에 나타난 타로 이미지와 해석자의 ‘생각덩어리’가 일치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이 둘의 싱크로율이 높을수록 우린 정확하게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질문’을 정하고 타로를 매개로 나름의 공명(共鳴)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스크라잉, 쌀점, 화점도 거슬러 올라가면 같은 원리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직관’이 틀리는 것이 아니라, 결국 숙련도의 문제입니다. 상류에서 내려오는 1급수의 물을 어디까지 수질을 유지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죠.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닙니다. 겨우겨우 1급수를 받아와 그 맛과 향을 알아챘다면, 명확하게 ‘언어화’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혼자 점을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해석을 점 노트에 간단하게나마 자신의 언어로 적는 행위는 일종의 구조화 작업이며, 점-신탁 행위의 중요한 마침표이자 매듭이 되는 것이죠. 마법사가 상징과 상응공부, 그리고 외국어 공부에 열을 올리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보다 정확한 표현, 뉘앙스, 그리고 패턴을 알아내고 재현하기 좋은 도구를 얻어내는 과정입니다. 수많은 경전이 비유와 우화로 가득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숙련된 마법사(해석자)라면 이 두 가지 프로세스가 동시에, 매우 빠르게 일어납니다. 이렇게 직관을 훈련하여 정확도가 높아지고 ‘본질’에 닿을 수 있다면 이미 그것은 ‘사이킥 능력’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저 일시적인 달의 영향이나, 빙의로 빌린 능력이 아닌 진짜 마법사가 자신의 한도 내에서 강도를 조절해가며 사용할 수 있는 힘인 것이죠. 그렇게 마법사는 한걸음씩 발전해 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