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시각화와 미적 고찰

<Optics: the principle of the camera obscura>, Engraving, 1752.


따라서 스투디움을 방해하러 오는 이 두번째 요소를 나는 푼크툼(punctum)이라 부를 것이다. 왜냐하면 푼크툼은 또한 찔린 자국이고, 작은 구멍이며, 조그만 얼룩이고, 작게 베인 상처이며──또 주사위 던지기이기 때문이다. 롤랑 바르트 지음, <밝은 방, 사진에 관한 노트>, 동문선, 2006. p. 42.

하나의 세부 요소가 나의 읽기를 온통 사로잡는다. 내 관심의 격렬한 변화, 섬광과 같은 것이 나타난다. 사진은 무언가의 표지를 통해서 더 이상 하찮은 것이 아니다. 이 무언가가 영감을 불러일으켰고, 내 안에서 작은 전복, 사토리, 즉 어떤 공(空)의 지나감을 야기시켰다 [중략] 이상한 일이지만 (단순히 스투디움에 둘러싸인) ‘분별 있는 사진들을 장악하고 있는 덕성스러운 몸짓은 게으른 몸짓이다. 그 반대로 푼크툼의 읽기는 순간적이고 능동적이며, 야수처럼 웅크린다. Ibid., p. 67.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 ~ 1980)는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자이자 비평가이며 <밝은 방, 사진에 관한 노트>에서 사진 읽기의 아름다움을 숙고합니다. 손에 든 사진기 렌즈 너머 피사체를 바라보는 사진사. 그리고 인화된 사진을 본 감상자의 관심과 취미판단으로 일어날 사진 이미지 해석의 소위 ‘한끝 차이’를 말하지요.

스투디움과 푼크툼으로 상정된 그의 개념은 카메라 렌즈 앞에 놓인 필연성에 관한 주관적인 고찰로 이어집니다. 마치 르포 기사에서 볼 법한 전쟁 사진이나 정보제공의 성격을 띤 보도국 사진도 아닐 텐데요. 어떻게 미적 고찰을 할 수 있을까요? 사진에 관한 미적 고찰의 이슈는 사진기가 발명된 기술적인 배경을 기저에 깔고 19c 초 이래로 모방 및 재현에 관한 뿌리 깊은 철학적 이슈와 일맥상통하는 문제를 품게 됩니다.

그의 <사진에 관한 노트>를 읽으면 다음과 같은 마법적인 이야기를 생각합니다. ‘시각화visualization는 심상화의 노력 없이 사진을 찍은 듯 선명하게 떠올라야 한다.’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1] 에서 바늘귀 구멍을 꿰는 빛에 의한 반전된 이미지 상처럼 불현듯 머리속에 맺힙니다. 그렇다면 마법적 관점에서의 시각화는 어떨까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됩니다. ‘시각화’란 통상적인 사진 이미지처럼 단순히 평평하지마는 않은 것입니다.

프란츠 바르돈은 “마법은 실천적인 학문이며, 가장 고위의 기예” 라고 말합니다.[2] 그의 저서 <헤르메스학 입문>에서 제시하는 2단계 영 훈련 중 첫 번째는 “물건을 실제로 보는 것처럼 구제척으로” 시각화 하는 것이라고 씌어 있습니다. 중요한 건 “잡념이 방해할 때마다 묵주를 한 알씩 굴려 각종 방해 요소를 확실하게 제거하는 것” 이며, “주변의 모든 것을 잊은 채 오로지 떠올린 그 물건에만 집중하라”는 것입니다.[3]

따라서 마법에서의 시각화란 개인의 주관적인 해석의 개입을 초극한채 있는 그대로 본 사물을 담백하게 떠올리는 것을 뜻합니다. 바로 여기, 상상이 개입할 수 있나요? 아니요! “심상화 능력”[4]과 또 다른 것이 됩니다. 이에 화답하듯 프란츠 바르돈은 말합니다. “모든 형태의 시각, 청각, 지각 훈련 기법 등을 통해 우리의 의식은 확장된다.” 고 말이지요.[5] 마법적인 의식의 확장은 곧 “믿음을 강화화는 것”이며, 또한 “창조 행위를 하는 신을 모방하는 것이지요.”[6] 이는 곧 마법이자 연금술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말할 수 있습니다. 신을 닮아가는 과정 중 하나로서 아름다움을 손꼽는 것이라고.


[1] 롤랑 바르트 지음, 김웅권 옮김, 『밝은 방, 사진에 관한 노트』, 동문선, 2006. Pp. 131-132.

[2] 디터 뤼게베르크 엮음, 『마법사 프라바토와의 인터뷰』, 좋은글방, 2009. p. 170.

[3] 프란츠 바르돈 지음, 『헤르메스학 입문』, 좋은글방, 2008. Pp. 112-113.

[4] 디터 뤼게베르크 엮음, 『마법사 프라바토와의 인터뷰』, 좋은글방, 2009. p. 40.
프란츠 바르돈에 따르면, “우리가 시각, 청각, 촉각, 또는 이 모든 것을 함께 동원하기도 하고 맛과 냄새, 그 밖의 어떤 부대 상황 등을 동원해, 어떤 인물, 존재, 생각, 화젯거리, 그림, 어떤 사물의 특성 등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고 심상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라고 심상화 능력을 정의 내리므로 시각화와 서로 다릅니다.

[5] Ibid., p. 37.

[6] Ib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