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나눔] 연금술개론 과제: 박상륭의 <소설법> 無所有 해석(1/4)

▶ 본 지식나눔글은 <연금술개론> 수업 중 텍스트로 함께 읽은 박상륭의 <무소유> 속 ‘가장 감명깊은 대목을 연금술적으로 해석하기’ 수강생 과제제출물 중 우수작입니다.

그 비둘기가 떨어뜨려준 ‘감람잎’은 한 덩이 빵떡이었는데, 문잘배쉐 성민이라면, 잘 알고 있는 음식이 이것이었다. 그것은, ‘염원을 이뤄주는, 성스러운 돌’이 챙겨주는 것으로써, 옛사람들은 그것을 ‘만나’라고 일렀던 것도, 시동은 알고 있다. (사실은, 저 ‘염원을 이뤄주는 돌’이 챙겨내주는 음식의 식단은 다양해서, ‘식탁에 둘러앉은 누구나의 입맛에 좇아, 원하는 대로 차려져’ 나왔으되, 이 저녁 시동은, 자기만의 식단을 염두할 처지도 형편도 아니었으니, 저보다 더 호사스럴 음식을 바랄 수는 없었을 것이었다)

​시동은 그랬기에, 고통하는 어부왕이, 전신의 기력을 다해 고통을 참으며, 저녁 식탁에 앉아, 시동이 자기를 염려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왕은 또, 시동이 자기가 무엇을 위해 성을 벗어났는지, 그것까지도 짐작해 알고 있으리라는 믿음도 갖게 되었다. 했으니, 그 감격으로, 일어서, 문잘배쉐 쪽에 대고, 합장해서는 무릎꿇어 절하고, 또 일어서 무릎꿇고 했다.

-박상륭의 <소설법> 무소유 p.34쪽

시동은 연금술의 여정에 올라있다. 의기양양하게 여행길을 나섰고, 머지않아 이정표를 발견했으며, 고민에 빠진다. 왼쪽길인지 오른쪽길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고요한 주변과 대비되게 자신을 반추하며 한걸음도 떼지 못해 멈춰 있기까지 하다. 문잘배쉐가 ‘닿을 수 없는 성’이라고, 자기는 미노스의 미로에 갇혔다며 좌절한 순간에 비둘기는 시동에게 확신을 준다.

성경의 비둘기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부터 등장한다. 대홍수-물의 시련이 내렸을 때, 방주에서 내려야 할까 고민하던 노아에게 확신을 준 동물이다.

저녁때가 되어 비둘기가 그에게 돌아왔는데, 싱싱한 올리브 잎을 부리에 물고 있었다.

그래서 노아는 땅에서 물이 빠진 것을 알게 되었다.

창세기 8장 11절(카톨릭 성경)

노아는 비둘기가 들고 온 감람잎을 받아들고 방주에서 내릴 것을 결심했다. 시동은 빵떡-만나를 받아들고 어부왕의 손길을 느낀다. ‘만나’는 모세가 40년간 광야를 헤메며 얻은 음식이자 기적의 상징이다. 그는 확신을 얻은 만큼, 어부왕의 고통에 깊이 공감한다.

비둘기와 만나, 모두 성배와 관련있는 이야기다. 웨이트 타로의 컵 에이스 이미지는 이 관계를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컵 에이스에서 성배에 뛰어드는 만나-비둘기는 플라스크(Vas) 속으로 뛰어드는 성령(Holy-Spirit)의 도래를 의미한다. 성배의 내용물을 정화하고 새롭게 만들 수 있는 충격요법이자 영적인 스파이스를 상징한다.

​시동은 심연에 자맥질을 하며 인생을 다 산 듯, 허무감을 느낀다. 수많은 상징을 되새김질하며 헤메던 그가 ‘정지’했을 때 비둘기-만나가 내려온다. 토성-경계의 끝자락에 닿아 성배의 잔-테두리에 위치했을 때(혹은 가장 깊은 곳에 가라앉았을 때) 비로소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로보로스의 순환을 거쳐 첫 자리로 돌아오는 한 사이클을 완성했다.

​​새롭게 용기백배하여 (힘에 용기를 섞어 염통에 모으고, 용기에 힘을 섞어 뒤꿈치에 뭉쳐) 나아간다. 그는 이미 젊어진 것이다. 그의 중심은 변화했다.

그 ‘불새’는, 무소에 숨기는커녕, 차라리 무방비로, 또는 수용적으로 자신을 훨씬 드러내버리는 것은 아닐라는가? 훤히 보이는 것은 (누구도)찾지 않으므로, 찾아지지 않는다.

박상륭의 <소설법> 무소유 p.36 둘째줄

‘가장 흔한 것, 가장 천한 것’이란 비유로 표현하는 ‘니그레도’-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떠오르게 한다. 다음 문장서 ‘구하려했던 불새까지는 아니더라도, 그것의 붉은 깃털이라도 하나 뽑아, 품 속에 넣고 돌아오던 중’ 구절은 시동이 이제 변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찢어발겨졌으며 하얀-백골에서 붉은색으로 변한다. 해골처럼 보이지만 가장 생명력이 넘치는 상태가 된 것이다.

위의 삽화는 박상륭 無所有 속 시동의 여정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삽화 오른쪽의 눈을 가린 사람은 환영과 상징 속에서 헤메는 시동의 모습 같다. 삽화 중심의 Naturae Lumen(자연의 빛)에서 멀어지고, Regio Phantastica(환영의 영역)에 점점 가까워졌다가 다시 돌아온다. Mons Magorum Invisibilis(마법사의 보이지 않는 산)은 문잘배쉐에 대한 비유를 떠올리게 만든다.

​이는 ‘없는 것’, ‘모르는 것’, 혹은 ‘진리’를 목표로 삼아 나아간 모든 입문자들의 이야기다. 나아간 순간, 그는 원운동을 하며 제자리-중심으로 돌아온다. 시동은 ‘안’에서 찾게 될 성배를 ‘밖’으로 찾아 헤매다 안으로 돌아왔다. 성경의 돌아온 탕자, 달란트의 비유를 모두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밖으로 나갔기에 어부왕을 이해할 수 있었고 해골의 입으로 ‘모든길은그러나시작에물려있음을!’이라 외칠 수 있었다.​

‘성배’의 의미는 매우 가변적이다. 잔과 그릇(Vas)의 의미가 대표적이지만 일종의 우로보로스이기도 하다. 잔에 무언가를 담고 넘치고 쏟아내고 새로 받아낼 수 있듯, 경계는 있다고 하면 존재하며 없다고 생각하면 금방 사라진다. 시동은 이런 진리를 여행 끝에 발견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