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지식나눔글은 <연금술개론> 수업 중 텍스트로 함께 읽은 박상륭의 <무소유> 속 ‘가장 감명깊은 대목을 연금술적으로 해석하기’ 수강생 과제제출물 중 우수작입니다.
‘어부왕(魚夫王, Fisher King)’이라고 더 널리 알려진 안포르타스(Anfortas)는, 성배(聖杯, Saint Graal, Seynt Grayle, Sangreal, Sank Ryal, Holy Grail)를 안치하고 있는 문잘배쉐(Munsalvaeshce, Corbenic)의 성주(城主)였더니, 이 성배지기가 수업기사(Knight-Errant) 시절, 모험을 찾아 헤매던 중, (어떤) 상대방 기사(는 回敎徒라는 설도 있으나, 傳說은 傳說이어서, 實史性을 반드시 띄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稗官은 굳이, 그는 다른 누구도 말고, 롱기누스(Loginus)였다고 우겨, 믿는바이다)의 독창(은, 저 聖杯의 城에 비치되어 있다는 얘기도 전한다)에 ‘치부’를 다친 뒤, 어떻게도 치유가 되지 않는 그 상처 탓에, 살이 썩느라 역한 냄새를 풍기면서도, ‘죽지도 못해’살며, 창 쥐었던 손에 낚싯대를 쥐어, 고기 낚기로 하루, 또 하루, 그리고 다른 하루, 영겁을 치고 덤비는 시간의 아픈 물살, 그 독수리의 부리에, 무방비인채 상처를 쪼이기로, 시간(時間)에 묶여 있는데, 그랬음에도 그는 네미(Nemi) 숲의, 다이아나(Diana) 여신의 사당지기 버비우스(Virbius)와는 달리, 자기 다음으로 성배지기가 될, 어떤 기사가 나타나는 날로, 자기 상처가 말끔히 치유될 것이라는 희망 하나는 갖고 있었다. 그러자니, 생기를 잃어 찬바람과 대막大漠 휩싼 성에는, 악취 맡고 날아든 까마귀들이나 뗴 지어 울부짖었다. (아는 이들은 아는 바대로, 안포르타스와 버비우스, 저 두 사제왕들의 괴이한 운명들은, 지극히 상반적이라도, 그것들을 천평칭에라도 올려본다면, 그 무게들은 분명히 똑같을 것이라는 것이, 本 稗官의 추단이다마는, 누가 염라 전에 가서, 그 ‘운명의 저울’을 빌려 올 수 있는지, 그것만은 패관도 못말해준다.)
<중략>
ㅡ’성배’란 다름 아니라, 부족 탓에 한(恨) 맺힌 사람 들의 원(願)을 이뤄주며, 병과 상처를 치유해주는, 영검한 힘이 있는, ‘성스러운 돌’이라고 하는데, 바로 그 돌을 뫼셔 지키는 사제왕의 상처는 어찌된 일인가? 원을 이뤄주는 것이 그것이라면, 이 왕의 원은 죽고 싶은 것이거늘, 조석으로, 저 돌의 빛에 상처를 쪼이되, 그 영력(靈力)은, 더욱 더 파고드는 그이의 상처와 고통은 비껴가며, 목숨만 끊임없이 이어가게 하고 있으니 이는 또 어찌된 일인가?
‘불’이란 사람에겐 은총이로되, 불 맞은 나무여 그대에게는 주살(呪煞)이 된 것 모양, 저 성석(聖石)도, 그것을 지켜 뫼시는 이에 대해서는 그러한 것인가? 아으, 불사조(不死鳥)는, (안포르타스와, 벼락 맞은 나무의 한숨과 탄식이 이것이지만) 재 속의 무슨 힘으로, 새로운 뼈, 새로운 깃털을 새로 차려입어, 새로 젊어져 푸르도록 붉게 날아 오르는가?
『小說法』 박상륭(1940.8.26 ~ 2017.7.1), 현대문학(2005), 無所有 9 ~ 11P 中
大關節, 성배가 무엇이 그토록 대단하기에 안포르타스는 죽지도 못하고 성배를 지키는가. 대관절 성배가 무엇이 그렇게 사람으로 하여금 간절하게 만들기에, 수 많은 사람들이 성배의 비밀을 지키려 목숨을 내던졌는가. 성전 기사단은 무엇을 지키다 화형당했는가. 도대체 성배에는 무엇이 담겨 있단말인가. 전승대로, 정말 예수의 피를 받아 담았는가?
또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그들에게 돌리시며,
“너희는 모두 이 잔을 받아 마셔라, 이것은 나의 피다.
죄를 용서해주려고,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
잘 들어두어라, 이제부터 나는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와 함께 새 포도주를 마실 그 날 까지,
결코 포도로 빚은 것을 마시지 않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공동번역, 마태오복음 26:27 – 29
진실로, 죄를 용서해주려고 예수는 피를 흘렸는가. 대속(代贖)인가. 그래서 죄의 사함을 받으려고 사람들은 그렇게나 성배를 찾아 목메었는가. 그렇다기엔 성배의 알려진 효능은 너무나도 물질적이다. 그렇게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경계하는 예수의 가르침과, 후대의 종교화된 그들의 초기 가르침에 비해서, 성배는 닿기만 해도 모든 것을 치유해버리는 기적의 잔이다.
’죽음’을 앞둔 예수가 그의 피와 생명력을 나눠 주었기에 성배는 기적이 되었는가.
그게 아니라면, 전승대로 아리마태아의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수습하고 저 오른쪽 옆구리를 찢어 그의 피를 성배에 받아 부었는가.
날이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태아인 사람인 부자 요셉이라는 사람이 왔는데,
그도 역시 예수의 제자였다.
이 사람이 빌라도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내어달라고 청하자,
빌라도는 쾌히 승낙하여 내어 주라고 명령했다.
공동번역, 마태오복음 27:57
그 아리마태아의 요셉이 영길리(英吉利)에 예수의 성배를 가져간 탓에, 안포르타스는 성배 지기가 되었는가. 안포르타스는 무엇이 아쉬워 계속 성배를 지켰는가. 그는 불구자다. 후계를 만들 수도 없는 불구자다. 예수를 죽인 롱기누스의 독창에 의해 ‘치부’를 다쳤다지 않는가. 성배는 만능의 치유기인데 어찌하여 그는 창조력을 잃었는가.
『 영겁을 치고 덤비는 시간의 아픈 물살, 그 독수리의 부리에 무방비로 상처 쪼이기로 ‘시간’에 묶여있다』고 한다. 안포르타스는 프로메테우스와도 같아보인다. 메코네에서 신을 속이고, 독수리에게 영원히 간을 쪼이고 있는 저 프로메테우스는, 영원과도 같은 시간 속에서 고통받으며 무엇인가를 지키고 버티었다. 그는 신이 숨긴 ‘불’을 인간에게 되돌려 주리라. 그리고 안포르타스처럼, 그게 갤러해드인지 란슬롯인지 퍼시벌인지 모르겠지만 누가 찾았던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저 헤라클레스가 나타나야 ‘끝’이 나는 프로메테우스처럼, 안포르타스에게도, 누군가 나타나서 454년만에 원탁에 앉아야, 그가 선망하는 ‘죽음’에 이른다고 하니 말이다.
안포르타스가 원하는 ‘죽음’은 문자 그대로의 죽음인가. 그는 만인의 선망기(羨望器), ‘성배’ 지킴이이다. 생명의 원천을 뿜어내는, 예수의 피를 가득 담은, 신의 아들의 피를 가득 담은 ‘성배’지킴이이다. 이미 영생을 살고 있는 자가 어째서 죽음을 택하는 것인가
『불이 사람에겐 은총이로되, 불맞은 나무여, 그대에게는 주살이 된 것 모양, 저 성석도, 지켜뫼시는 이에게 그러한 것인가』라니,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가져다 준 탓에, 저 만들어진 가엾은 판도라는 희망을 남기고 모든 재앙과 질병을 흩뿌렸단 말인가. 그러나 안포르타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다음 성배지기, 그리고 ‘죽음’이다. 그는 불사조가 되고 싶어하는 듯 하다. 죽음과 재생을 반복하며, 완성으로 거듭나는 불사조말이다. 그가 원하는 죽음은 연금술적인 ‘니그레도’를 너무나 대놓고 표상한다.
니그레도는 원질료 : Prima Materia나 혼돈 혹은 혼돈의 덩어리 속성을 지닌 시초의 상태이며,
원래 부터 있었거나 원소들을 분해함으로써 생긴다.
때때로 일어나듯이 분해된 상태를 전제로 한다면,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의 합일이라는 비유에 따라
대극의 합일이 이루어진다.
그러고나면 합일된 산물이 점차 검어지면서 죽게 된다.
연금술에서 본 구원의 관념, 칼 구스타프 융(1875. 7. 26 ~ 1961. 6. 6),
한국융연구원 C.G. 융 저작 번역위원회, 솔 출판사
그는 ‘죽고’ 싶어한다. 아니, 죽어야만 하리라. 반드시 죽어야만, 그는 부활하고 재생할 수 있으니 말이다.
니그레도에서 씻어냄으로 유도되는데, 이것은 직접 하얗게 하거나,
죽을 때 사라진 아니마 : Anima, 혼을 다시 결합하거나
혹은 많은 색들을 모든 색이 함유된 하나의 흰 색으로 옮기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로써 과정의 첫 번째 주요 목표, 알베도 : Albedo, 흰 팅크제에 도달한다.
연금술에서 본 구원의 관념, 칼 구스타프 융(1875. 7. 26 ~ 1961. 6. 6),
한국융연구원 C.G. 융 저작 번역위원회, 솔 출판사
죽음으로써 그의 피로 사람들의 죄를 구원(救援)하고 대속(代贖)한 예수처럼, ‘죽음’은 정화의 선제 조건으로 보인다. ‘씻어냄’으로 유도된다는 말 자체가, 정화에 가까우리라. 그러니 순결과도 같은 하얀색이 되는 것이 아닐까. 순백은 언제나 정화(淨化)와 정결(淨潔)의 상징이었다. 재와 같이 어둡고 검은 형태에서, 눈과 같은 흰백색의 형태가 된다니, 진실로 이르노니 이 어찌도 놀라운 기적인가. 안포르타스가 바라는, 성배가 자신에게 해주길 바라는 진정한 기적은 이것인가?
그러나 안포르타스의 선망은 단지 이 ‘정결화’에서 멈춤이 아니리라. 알베도는 그저 시작일 뿐이다. 진정한 완성으로 가는 길, 그가 원하는 것은 자신을 불태움, 완전히 불태움, 그렇다. ‘불’이다. 그는 프로메테우스이니 말이다.
그러나 은이나 달의 상태는, 태양의 상태로 더 고양되어야만 한다.
말하자면 알베도는 여명이다.
루베도가 되어야 태양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루베도는 불이 극도로 타오르는 동안, 알베도에서 직접 나온다.
연금술에서 본 구원의 관념, 칼 구스타프 융(1875. 7. 26 ~ 1961. 6. 6),
한국융연구원 C.G. 융 저작 번역위원회, 솔 출판사
안포르타스는 지금쯤 루베도에 도달하였을까.
아니면 아직도 갤러해드와 퍼시벨, 란슬롯이,
여행을 떠나 돌아오지 않았을까.
안포르타스는 원하는 때에 죽을 수 있을까.
나는 내가 원하는 때에 나를 죽여,
고통과 환희에 가득차,
기쁨에 가득 찬 비명을 지르며
나를 모조리 불태우고 정결하여,
완성에 이르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