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관에는 카발라가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우리를 설레게 한다. 10월말 개봉한 신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극과 극으로 갈린 평은 차치하고, 지금까지 쌓아올린 하야오식 애니메이션의 서사는 보편적인 신화의 공식을 철저히 따르고 있다.

신화학자인 조지프 캠벨은 영웅의 통과의례를 ‘출발(분리)-입문-귀환‘의 과정으로 보았다.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의 주인공들은 고향에서 떠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출발 단계에서 영웅은 어떤 존재를 만나고 그 존재로부터 영웅으로서의 소명을 전해 듣는다. 이를 통해 영웅은 자아를 각성하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준비를 하거나, 그 소명을 거부하여 가족을 잃는 것과 같은 희생을 치르기도 한다. 어떤 경우이든 영웅은 낯선 세계로 떠난다. 〈모노노케히메〉의 ‘아시타카’, 〈천공의 성 라퓨타〉의 ‘파즈’,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소피’도 형태는 다르지만 같은 맥락에서 일상에서 분리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다. 신화 속 영웅의 모습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 중 가장 글로벌하게 성공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위의 보편적인 신화구조를 충실히 따르면서 오컬트 소재를 아낌없이 드러낸 작품이기도 하다. 센-치히로를 통해 보여주는 ‘이름의 중요성’은 물론이요, 주인공이 각각의 영역에서 경험하는 것은 카발라 생명나무의 패쓰워킹 과정을 떠오르게 한다.

이야기의 시작은 언제나 10번. 말쿠트(Malkuth-왕국)에서 시작한다.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는 9번과 10번을 잇는 32번 경로다. 이곳은 입문을 앞둔 자들에게 고통스러운 경험을 선사한다. 캠벨의 말을 빌리자면 ‘영웅이 겪는 첫번째 시련은 어떤 공간에 갇히는 것이다.’ 이는 낡은 자기가 죽어야 새로운 자기로 태어날 수 있다는 의미를 드러낸다. 작중 낡은 유원지처럼 보이던 공간은 밤이 되자 돌아갈 길이 사라져버리고 부모님은 돼지로 변해버리는 충격적인 경험을 치히로에게 선사한다.

등변십자가, 즉 4원소 십자가는 완벽하게 균형 상태에 이른 4원소, 즉 말쿠트의 완성을 상징한다. 생명나무 위에서는 말쿠트를 4등분하고 레몬색 · 올리브색 · 적갈색 · 검은색을 칠해 이 상태를 나타낸다. 이때 레몬색은 예소드 방향에, 검은색은 클리포트, 올리브색은 네짜흐, 적갈색은 호드 쪽에 위치한다. 이들은 각각 세 기둥과 클리포트의 반영물로서 대지의 베일에 가려 희미하고 부드러운 색조를 띤다.

〈미스티컬 카발라〉 Part2. 말쿠트, 열 번째 세피라

〈미스티컬 카발라〉에 따르면 진화의 성장점은 말쿠트에서 예소드를 향해 올라간다. 치히로는 가족과 함께 긴 터널을 지나 유바바가 운영하는 여관의 입구까지 발견한다. 이곳은 치히로가 원래 살던 곳의 규칙이 하나도 통하지 않는다. 일하지 않으면 동물로 변해버리는 무서운 곳이다. 인간보다는 요괴가 득실대며 한 공간 안에서 사회를 만들어 살아가는 곳에서, 치히로는 하쿠의 도움을 받아 생존에 성공한다.

재미있는 점은 온천이라는 공간이다. 생명나무의 9번 세피라. 예소드는 정화의 공간이다. 예소드는 다른 모든 세피라의 방출물을 담은 저장소이자 물질계로 통하는 유일한 전달공간이다. 세페르 예찌라에 따르면 이 방출물을 정화하고 검증하여 바로잡는다. 요괴들은 이곳에 와서 더러운 몸을 씻고 정화한다. 속세의 찌든 때를 벗겨내고 원래의 형태로 되돌리는 것. 사실 유바바의 사업은 요괴세계에서 매우 필수적인 사업이다.

이 영역의 모든 구성원들은 유바바와 계약을 맺고 산다. 유바바는 사업수완이 좋고 계산이 빠르다. 전형적인 상인-수성의 모습이기도 하다. 직원들의 이름과 근무상황,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기록되어있는 사무실을 갖고 꼼꼼하게 일하는 모습이 자주 비친다. 그렇지 않으면 순식간에 온천사업장은 난장판이 되어버릴 것이다. 생명나무의 8번 세피라, 호드 영역의 존재가 할 만한 행동이다. 덧붙여 유바바가 순찰을 나갈 때 변신한 모습은 까마귀를 닮았다는 점을 잊어선 안된다. 까마귀는 수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똑똑한 조류다. 치히로의 수호자였던 하쿠가 유바바에게 마법을 배우는 제자라는 설정은 나름 개연성이 있는 전개라 할 수 있겠다.

작중에서 돈만 중시하는 측면만 보여준 것 같지만, 유바바는 태양-어린아이를 돌보는 역할도 지극정성이다. 물론 너무도 소중하여 어느 곳에도 가지 못하도록 감금하는 모양새더라도 유바바는 자신이 돌보는 아기를 끔찍히 아낀다. 이는 태양-왕을 지키는 수성-보좌관의 역할로 수많은 신화와 이야기가 증명하는 구도이다. 라이온킹의 비비원숭이가 사자를 들어올리던 모습을 기억해보라.

그렇다면 유바바의 쌍둥이 언니 제니바는 어떤 존재일까? 생명나무 다이어그램에 따르면 호드-수성의 대극(對極)에 존재하는 것은 네짜흐-금성이다. 치히로는 모습이 변해버린 동료들을 데리고 물 위를 달리는 기차를 타고 제니바의 영역으로 이동한다. 물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예소드-정화의 영역을 암시하는 상징 중 하나이다. 치히로는 온천을 넘어, 유바바의 사무실을 지나 태양을 잠깐 만난 후 금성의 영역으로 직행하고 있다.

제니바의 영역은 따뜻하고 평화롭다. 유바바보다 강력한 마법사. 어쩌면 더 엄정하고 익살맞을 수도 있지만 치히로와 동료들은 휴식과 함께 앞으로 해야할 일에 대한 조언을 얻는다. 이들은 서로 협력하는 법을 배웠고 치히로는 원래의 목적인 부모님을 구하고 하쿠도 원래대로 되돌려놓을 용기와 힘을 얻는다. 이곳에서 새로 만든 치히로의 머리끈은 유바바의 마지막 시험을 해결하는 중요한 열쇠가 되는데, 치히로가 각 영역의 도전을 멋지게 해결했음을 알려주는 토큰이기도 하다.

다시 생명나무 다이어그램으로 돌아와 설명하자면, 치히로는 10번 말쿠트-현실세계에서 9번 예소드-온천여관으로, 8번 호드-유바바의 사무실에서 6번-티페레트를 만난 뒤 7번-네짜흐 제니바의 영역을 거쳐 온천으로, 그리고 다시 현실세계로 돌아온다. 캠벨의 신화이론 ‘출발-입문-귀환’의 구도에 따라 치히로는 낯선 세계를 통합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고 출발 단계의 세계를 새로운 질서의 세계로 변화시켰다. 물론 치히로 자신의 내면이 변화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영화에서 삶에 대한 정답 또는 방향성을 제시하지 않는다. 우리는 애니메이션 주인공처럼 갑자기 환상의 세계에 끌려가는 삶을 살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에서의 도전과 낯선 일들을 해결하며 살아간다. 그의 은퇴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제목은 마치 보편적 경로에서 자신이 그려나가는 주관적인 경험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청중에게 묻는다. 카발라를 공부한 이들은 대답할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변성하고 진화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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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티컬 카발라〉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책 소개 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