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 청탁을 받고는 흔쾌히 쓰겠노라고 했지만 좀처럼 짬을 내지 못했다.
쉬는 화요일, 황금언덕에 홀로 앉아 한숨에 썼다.
‘진짜 오컬트’ 지지자, 좋은글방 독자들께 감사하며 이 글을 바친다.
—————————-ISSUE 오컬트의 세계
분야를 막론하고 장르 콘텐츠의 강세가 계속되고 있다. 특히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파묘>의 기록적인 흥행 이후 호러의 하위 장르인 오컬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가운데, 국내에서 인기를 끌었던 오컬트 콘텐츠의 계보와 최근 경향, 관련 출판문화 등 장르로서의 오컬트를 조명해 본다.
[출처] <기획회의> 통권 607호 2024.05.05. 격주간|
신화를 일상으로, 오컬트의 샘을 퍼 올리다
정은주 (좋은글방 대표)
‘오컬트’ 라는 단어조차 알지 못했던 시절, 나는 콘텐츠 기획을 업으로 삼고 있었다. 콘텐츠를 만들 때 타깃의 눈높이는 초등학교 4학년. 무엇인가 메시지를 명확하게 전달하여 필요한 내용을 교육하는 것이 오랫동안 내가 배우고 진행한 콘텐츠의 가치였다.
어느 날 문득 답답해졌다. 그 모든 콘텐츠가 의식의 표면을 맴돌다가 거품처럼 꺼지는 것이 재미없게 느껴졌다. 계몽적이고 교훈적인 콘텐츠가 아니라, 인간 무의식 안에 깊이 뿌리 박혀 슬쩍만 건드려도 생각과 감각을 압도할 만한 흐름이 없을까, 고민을 거듭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신화’. 신화라니! 앞뒤 문맥 없이 너무나 비논리적인 옛날 이야기. 그리 생각했던 신화를 다른 시선으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40대 중반에, 오컬트라는 영역과 처음 만났다. 참으로 별세계였다. 신화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거대한 메타포 덩어리였다. 놀랍게도 거기 완벽한 질서와 논리가 관통하고 있었다. 그렇지! 그러기에 세계 모든 문명이 신화라는 메타포 위에 그들의 왕국을 세운 것이었다.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중국, 인도, 이집트와 근동, 그리스와 로마, 그리고 성서. 그 모든 것이 마치 서로 짠 듯 같은 논리 맥락 위에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던 모든 스토리텔링의 구조가 거기 있었다.
나는 완전히 몰입하여 흥미진진한 ‘지식’의 세계에 빠져 들었다. 한 번 길어 올리기 시작한 샘물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길어 올리며 사방으로 전개되어 나갔다. 그리고 우주보편법칙을 인격화 하고 그들의 관계를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낸 것이 곧 신화라는 실을 서서히 깨달아 나갔다.
오컬트 전문 출판사
그런데 우리말 자료가 턱없이 부족했다. 외국의 책이나 자료를 엉터리로 번역한 자료들, 도무지 내용을 알 수 없는 애매모호한 구절들, 이리저리 난무하는 용어들. 답답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점성학’ 강의를 찾아내 수강하고 ‘카발라’를 공부했다. 그쪽은 신화 분야보다 더욱 열악했다. 우리의 판타지 콘텐츠가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를 넘보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 있었다. 기반이 허술해서 구조가 빈약하고 빈 틈 투성이 집을 지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오컬트 용어를 나름대로 정리하고 연관관계를 정립하면서 출판사 등록을 했다. 필요한 부분을 찾아 ‘쪽번역’ 하던 점성학 책을 출간하자는 생각에서 그야말로 아무 고민 없이 덜컥 저지른 일이었다. 마케팅이나 수지 타산에 대한 아무 계획도 없이, ‘오컬트 전문 출판사’ 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콘텐츠 기획을 하던 회사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 ‘좋은글방’.
나를 아끼던 교수님이 소식을 듣고 화들짝 놀라 말리셨다. “네가 돈이 남아돌아 철철 흘러 넘쳐 달리 쓸 데가 없거든 그때 출판을 생각해라.” 그때는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책 내는 일이 무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이렇게까지 펄쩍 뛰나 생각했다. 전시관도 뚝딱 만들어내는데 책쯤이야. ‘내 공부 한다 생각하고 책으로 내면 그만이지.’ 이런저런 계산도 없이 어쨌든 시작했고, 책을 내는 과정은 즐거웠다.
사실 나는 무모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이제 계몽의 시대는 갔고 신화의 세계가 오고 있다. 시대와 지역을 뛰어넘어 인류 전체가 공유하고 있는 ‘원형적 무의식’이 신화와 판타지와 오컬트의 모습으로 우리의 사상과 관념을 압도할 것이다. 우리는 서로 강요하지 않고서도 동일한 맥락의 서로 다른 이야기와 세계를 펼칠 수 있다.
확신은 맞을지 모르지만 현실은 교수님 말씀이 옳았다. ‘오컬트 전문 출판사’ 라는 깃발을 어찌해야 할지, 과연 나의 확신과 현실을 어떻게 버무려 끌고 나가야 할지,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때 교수님의 만류하던 표정을 떠올리곤 했다. ‘내 공부’라는 핑계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거창한 흐름이 내 앞에 닥쳤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오컬트 콘텐츠를 거뜬히 감당할 동지이자 스승을 만났다. 덕분에 하나의 깃발을 들고 내 공부를 이어가며 오컬티스트로서 출판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런 책이 있네
<기획회의>에서 원고 청탁을 받고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니, 23년이라는 세월이 참 무심하게도 흘러갔다 싶다. 책 한 권을 내려면 번역, 용어 정리 그리고 실천적 정당성 등을 내부에서 하나하나 모두 해내야 한다. 초기에는 번역을 외부에 맡기거나 용어 정리팀을 꾸리며 여러 가지 시도를 해봤지만 모두 실패했다. 내용을 모르고, 실천적 경험 없이, 검증되지 않은 상태로, 오컬트 책을 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컬티즘은 ‘양날의 검’이다. 수많은 ‘사이비’와 ‘현자’가 그 안에 공존하고 있다. 인류 문명을 선도한 정신적 토대로서 다양한 학문과 종교와 예술을 피워냈으며, 동시에 광신이나 미신 나아가 사기의 질료가 되어왔다. 그래서 자료 하나 말 한마디가 조심스럽고 위험천만하다. 모든 오컬트를 미신으로 치부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쩌다 들은 ‘오컬트 단어’가 그의 무의식을 자극하기 마련이다. 하물며 ‘책’ 아닌가! 책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어떤 매체보다 공신력을 지닌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아쉽게도 매출력은 형편 없다.)
‘오컬트 전문 출판사’로서의 포지셔닝은 ‘좋은글방은 절대 허투루 오컬티즘을 말하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그래서 책 한 권 내는 데 1년 혹은 그보다 훨씬 오래 걸린다. 번역과 집필을 거의 내부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다. 초반의 실패를 거울 삼아, 기획 단계부터 아예 내부 작업으로 못을 박는다. 실천적으로 검증이 되지 않았거나 논란의 여지가 있는 책은 선택하지 않는다. 모든 작업을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검토하고 또 검토한다.
별다른 계획 없이, 특히 국내 오컬트 경험이나 네트워크 없이 시작했으니 당연히 힘들었으나 오히려 다행인 측면도 있다. 제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개념을 확립하고 용어를 정리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좋은글방은 이와 같이 카발라, 헤르메스학, 점성학, 연금술, 방어마법, 소환마법, 아스트랄 여행, 타로, 위카 등의 콘텐츠를 정립하고 용어를 정리하여 개념을 확립해왔다. 오컬티즘에 관련되는 모든 콘텐츠가 제대로 의지할 수 있는 토대. 이것이 좋은글방의 존재 이유이며 목표다.
좋은글방의 종수는 몇 권 되지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 10년이 넘는 스테디셀러다. 물론 매출은 형편 없다. 그러나 좋은글방의 독자는 한결같이 ‘찐 독자’들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리 책을 훑어보며 이렇게 말한다. “어머나, 이런 책이 있네. 소환마법이래. 연금술이래.” 대놓고 장난처럼 낄낄대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수많은 구도자와 수행자들이 좋은글방을 믿고 그 책으로 진지하게 수행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는 수많은 판타지 콘텐츠 생산자들에게 좋은글방이 얼마나 사랑을 받고 있는지를. 지지와 기대로 우리 편집실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이런 책도 있을 법한 일이다.
진짜 됩니까
23년은 무심하게 흘렀지만, 의도와 상관없이 아니 누군가 큰 그림을 그린 것처럼 예상치 못한 상황이 펼쳐졌다. <헤르메스학 입문>을 출간하고 몇 년 동안 정말 많은 전화와 메일이 당도했다. 이 책은 ‘이론편’과 ‘실천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실천편의 내용에 따라 실제 수행을 한 사람들이 잘 하고 있는지 검증을 받고 이런저런 질문을 하려는 것이었다. ‘진짜 되는 거 맞습니까?’ 라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았다. <미스티컬 카발라>를 본 사람들, 타로나 점성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수많은 피드백과 질문을 보냈다. 예고도 없이 대문을 두드리고 무작정 들이닥쳐 자신의 상태를 검증 받고 질문하려는 사람들도 꽤 되었다.
오컬티스트로서 책을 출간한다는 것이 얼마나 막중한 일인지 실감한 나날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좋은글방은 산란 상태의 국내 오컬트에 아무런 네트워크도 없이 시작했다. 따라서 이 같은 피드백은 매우 귀중한 데이터이며 동력임이 틀림없었다. 해외 마법단체에서 활동했던 뛰어난 오컬티스트를 동지이자 스승으로 만나지 못했다면, 이 모든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도, 피드백을 처리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상황은 그러했다. 그런데 일일이 대응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사실 오컬트에 진심인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 많은 사람과 만나거나 교류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드러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화를 하거나 찾아온다는 것은 ‘절실함’의 반증이었다. 출판 과정에 동참하고 싶어하는 이들도 있었다. 덕분에 일면식도 없었던 국내 오컬트 상황을 빠르게 판단하고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우리는 ‘독자평가단’을 만들어 출판 과정에 참여할 통로를 열었다. 그저 만나 제목이나 표지를 체크하고 함께 설레며 ‘설립자’의 기쁨을 누렸다. 이는 SNS 모임인 ‘마법동호회’로 이어졌다. 마법동호회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우리의 ‘오컬트 콘텐츠’를 생산하는 기반이고 매체다.
자연스럽게, 우리가 출간한 책의 콘텐츠를 교육하고 검증하는 ‘강좌’로 이어졌다. 나는 오컬트의 실제 수행이 학원 같은 자본의 논리에 따라 전개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티벳이나 인도나 서양 마법단체의 비의 전수 과정처럼, 스승과 제자의 끈끈한 링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매우 ‘시대착오적’이어서 혼란스럽기 그지 없었다. 더욱이 점차로 강좌가 출판을 경제적으로 지지하는 상황이 되었는데, 나에겐 늘 딜레마가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수행공동체(OIP)’라는 일종의 오컬티스트 단체를 설립해 ‘시대착오적’인 오컬티즘을 실행하면서, 콘텐츠로서 오컬트를 즐겨도 얼마든지 좋은 분야를 동시에 가동하고 있다. 양쪽 모두 탄탄한 커리큘럼을 자랑하는 좋은글방의 실체다. 오컬트를 기뻐하는 사람, 마법에 진심인 사람, 특별한 ‘에너지’를 제 것 삼고 싶은 사람, 판타지의 세계를 즐기는 사람, 오컬트와 신화를 학문적으로 접근하는 사람. 모두 좋은글방의 독자이며 지지자이며 동지다.
그런데 오컬트가 좋아
좋은글방은 방배동에서 대학로로, 그리고 2011년에는 (거의 망한 상태로) 파주 헤이리예술마을로 이사해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다. 헤이리에서 우리는 ‘마법상점’을 열었다. 오컬트를 검증하고 누리며 대중화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었다.
오컬트는 일상적이지 않은 에너지를 우리 생활에 끌어오는 작업이다. 천지의 분별, 자연의 순환, 별들의 운행, 그리고 신의 이름. 이처럼 우리 곁에 있으나 의식적이지도 일상적이지도 않은 것들에게 (마치 신화처럼) 의미를 부여하고 메타포를 현실화하여 일상 안에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저 봄이 되고 여름이 지나가며 겨울로 이어지던 어느 날,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의 서사’가 삽입되면서 ‘순간’은 특별한 의미로 빛나고 대우주의 법칙이 내 안의 오장육부와 연결된다. 이 순간, 나는 오컬티스트가 되는 것이다. 마법상점, 강좌, 리추얼 이벤트가 좋은글방이 주창하는 오컬트를 이렇게 일상 속의 실체로 만들고 있다.
23년을 지나는 동안 바람직하지 못한 ‘오컬트 뉴스’가 몇 차례 세간을 휩쓸었다. ‘사령카페’ 사건이 일어나고 많은 오컬티스트가 ‘오컬트’라는 단어를 간판에서 떼어냈다. ‘오컬트 전문 출판사’라고 하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봐요, 라고 애정 어린 충고를 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종종 사이비 파동이 지나갈 때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오컬트가 어때서? 양날의 검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한, 오컬트는 우리의 순간을 빛나게 의미있게 아름답게 해주는 축복인데!
계몽 대신 오컬트가, 교훈 대신 신화적 스토리텔링이 시대정신이 되고 있다. 다양하고 많은 아이템이 ‘마법적 에너지’에 얹혀 팔려나간다. 돈 버는 에너지, 예뻐지는 에너지, 사랑을 성취하는 에너지, 머리 좋아지는 에너지. 이를 ‘미신’이라 훈육한다면 이제 비웃음을 살 것이다. 모두 오컬티스트가 될 이유도 필요도 없다. 오컬트와 반대되는 논리가 반드시 필수적이어야 할 영역이 존재한다. 그것은 지켜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나 저 깊숙이 잠재되어 건드려질 순간을 기다리는 ‘오컬트 샘’을 갖고 있다. 필요할 때 퍼 올리면 된다.
많은 사람이 마법상점에 진열된 좋은글방의 책 앞에서 서성댄다. 작년까지만 해도 부끄럼 반 장난 반 웃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부쩍 진지하다. 우리는 그 앞에 당당히 신화의 ‘실체’를 내놓을 것이다. 우리의 무심한 순간을 빛나게 바꿔줄 오컬트의 다양한 실체를!